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개전 === 1216년 10월, 거란 유민 수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창주]]로 쳐들어왔다. 이때 거란군 150명이 창주성문을 돌파하려다 고려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리고 거란군 2천여 명은 성주의 구천에 이르렀다가 서경군에게 패해 115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참지정사]] [[정숙첨]]을 행영중군원수, [[중추원|추밀원]]부사 [[조충(고려)|조충]]을 부원수로 삼은 토벌군을 편성해 김취려, 노원순과 합세해 거란 유민들을 섬멸하게 했다. 이때 개경 사람으로서 직업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종군할 만한 자는 모두 소집하고 [[승병|승려마저 군사로 삼으니]] 그 규모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수만 명이지, 실상은 오합지졸이었다.[* 대부분이 노약자들이었다. 용맹한 자들은 죄다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들이었다.] 정예병들은 이미 [[조위총의 난]] 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정숙첨은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고 개경 인근에서 가만히 진을 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최충헌의 이같은 삽질은 고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던 전세가 반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16년 10월 말, 삼군은 거란의 소규모 병력을 쉽게 격파한 뒤 성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거란군은 야밤에 청천강을 건너 [[서경(고려)|서경]]으로 향했다. 당황한 노원순은 이를 막으려고 추격했지만 [[위주]]에서 거란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자만 1000명이 넘는 패배를 당했고 이양승 등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개경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는 사람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후 거란군은 안정역, 임원역, 참화사, 묘덕사, 화원사를 약탈하고 삼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대동강]]을 건너 [[서해도]]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개경 근처까지 쳐들어왔다.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진입하자, 최충헌은 자신의 가병을 좌경리로부터 우경리까지 사열했는데 그 길이가 2~3리(약 1km)에 달했다. 그리고 창자루에 은병을 달아매어 백성들에게 자랑하게 해 [[사병]]을 모집했다. 또한 아들 [[최우]]의 가병은 선지교로부터 이령을 지나 숭인문까지 이르렀는데, 기를 세우고 북을 세우면서 전투를 연습했다. 그러나 이는 실상 철저히 [[최씨정권]]의 권력을 보위하기 위한 행위였는데 '''문객 중 거란군을 무찌르겠다고 칭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먼곳의 섬으로 유배보냈다.'''(...) 또한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전투를 연습시켰는데, 문의 층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오를 수 없어서 사람이 말을 대신하게 해 사병들이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나면서 서로 싸웠다. 또 거란의 장군이 금패를 차고 있는 인형을 만들어서 이를 목베고 군사들이 그 목을 들고 개선하는 연극을 선보였고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하례하는 ~~[[코스프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최충헌은 그 광경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기생들에게 은병과 비단을 하사했다. 그러던 중 거란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정숙첨은 몸을 일으켜서 군대를 이끌고 흥의역으로 진을 쳤다. [[모랄빵|그런데 평주방어군이 합류하려고 온 것을 병사들이 "거란군이다!"라고 오해하고 달아났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오직 조충만이 군사를 통제해 혼란을 수습했다. 그후 적이 [[황해도]] [[염주]]와 [[백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정숙첨 등은 흠의역, 금교역 사이에 진을 쳤다가 다시 후퇴해 국청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던 중 [[평천군|평주]]에서 거란군 두 사람이 사로잡혔는데, 그들이 말하길, "우리 군이 이달 그믐날에 개경을 침범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최충헌은 이 말을 듣고 신선주, 기윤위 등에게 개경 시내에 군대를 배치하게 하고 '''최충헌 본인은 군사 수만 명으로 하여금 자기 집을 지키게 했다.''' 최충헌의 이같은 활약(?)은 백성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흥왕사, 경복사, 왕륜사 등의 여러 절에 소속되었다가 이번에 거란군 토벌을 위해 종군한 중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일찍이 낭장 김덕명이라는 인간이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얻어낸 뒤 여러 절들을 깨부수고 중들을 요역에 강제 동원한 적이 있었고 중들은 이에 원한을 품고 거란의 침공으로 흉흉한 와중에 기회를 틈타 최씨 정권을 뒤엎기로 작정했다. 1217년 2월, 중들은 새벽에 군영을 이탈해 선의문 밖으로 달아나 "거란군이 벌써 쳐들어왔다."라며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성 문지기가 열어주지 않자, 그들은 문을 부수고 개경 시내로 들어가 김덕명의 집을 [[개발살]]낸 후 최충헌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최충헌의 가병들이 들이닥쳐 중들을 격파했고 뒤이어 도망치는 승병들을 추격해 모조리 쳐죽였다. 이때 죽어간 승려의 수는 8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숙첨이 [[하동군]]으로 귀양갔다. 정숙첨은 최우의 장인인 신분을 내세워 서너 군데에 큰 집을 지었고 [[원수(계급)|원수]]가 되어서는 군졸들의 뇌물을 많이 받아먹었다. 게다가 그는 최충헌이 약한 군사만 맡기고 거란을 토벌하게 강요하는 걸 원망해 [[팩트폭력|"최충헌이 왕실을 몹시 쇠잔하게 하여 스스로 적군을 불러오다시피 하고, 도리어 나를 보내어 적군을 막으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불만을 터트리다가 이게 발각되고 말았다. 최충헌은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지만 최우가 간곡히 청해 그만두고 하동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217년 3월, [[전라도]] 초군별감 홍부는 "[[전주]] 군사가 중도에서 제멋대로 난을 일으켜 [[주(행정구역)|주]]의 [[아전|장리]]들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진위현 사람 [[이장대]]와 이당필, 김례 등이 무리를 모아 [[현령]]의 병부와 인을 빼앗고 창고를 열어 촌락에 곡식을 나눠 주니 백성들이 많이 가담했다. 이장대는 스스로를 정국병마사라 칭했고 그의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붙였다. [[광주시|광주]], [[수주]]의 군대가 출동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오히려 격파당했고 다시 [[충청도]], [[양광도|양주도]]의 군대가 출동해 맞붙은 결과 이당필과 김레가 잡혔고 [[반란군]]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이후 이장대는 [[상주]]로 달아났다가 [[안찰사]]에게 잡혀 개경에서 이당필, 김례와 함께 처형되었다.(이장대의 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